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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을 정복한 로마인은 150년 후 키케로와 카이사르 시대의 로마인처럼 ‘온화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기질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중 코리올라누스 편을 통해 부분적으로만 드러납니다. 여기에 실린 이야기에 따르면 이들은 정치 투쟁에서는 결코 타협하는 법이 없지만 가정생활에서는 고결한 미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로마인은 이로쿼이족 같은 기질이 상당히 강했습니다. 즉, 전쟁이 체질화 된 것이었죠. 그래서 적국의 도시를 급습하여 점령했을 때 병사, 즉 강철 같은 규율이 느슨해진 시절의 교육받지 못한 농민은 앞길을 가로막았던 모든 생명체는 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는 물론이고 동물까지도 도륙했습니다.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면서 미지근한 수법이나 근대의 박애주의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고 할수는 없는 셈입니다.
다섯 세대가 지나자 이탈리아의 로마인은 그리스 문화에 물드는 듯 보였고, 이 기간에 동방의 속주들은 로마에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이처럼 급속한 국제화 시대에, 로마 귀족은 먼저 국가 내부에서 화합을 이루었고 그런 다음에 이탈리아에서 지도력을 안정시켜 마침내 세계 제국을 이끌었지만, 결국 스스로 분열하고 말았습니다. 로마 제국은 도급업자, 대부업자, 곡물과 노예상인(소위 기사단 계층)을 길러냈는데, 이들은 원로원을 구성하던 대지주들을 자리에서 밀어내고, 속주들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은 뒤 더할 수 없이 잔인하게 약탈함으로써 제국의 통치를 마비시켰습니다. 이제 이런 상황을 벗어나는 길은 황제가 통치하는 방법 뿐이었습니다. 청년기에 키케로는 농업파와 상업파로 나뉘어 대립하는 귀족츠으이 자멸적인 투쟁을 지켜보며 자랐습니다. '신출내기'였던 키케로가 정계에서 출세하려면 폼페이우스와 같은 저명인사가 되어야 했지요. 그렇지만 그는 적어도 한 가지 정책만은 확고하게 추구했는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계층간의 조화'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추진될 수 없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상비군을 육성했습니다. 이 상비군으로 튜턴족과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골족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시민 정부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군지휘관을 계속 길러내야 했던 것입니다. 이 지휘관들 중 마지막 인물이 율리우스 카이사르 였지요. 그가 마지막이었던 이유는 원로원을 강압하지 않는 대신 스스로 원로원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그의 짧은 치세는 로마의 발전 과정에서 기억할 만한 사건입니다. 이 기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처음으로 세계군주국이 다시 출현했습니다. 카이사르는 당대 그리스 문헌에서 모든 인종의 구우너자라고 칭송받았지요. 그가 살해된 후 군대 지휘권을 두고 경쟁자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지요. 결국 카이사르의 기병대장이었던 안토니우스가 군대의 절반을 차지하여 로마 제국 동부로 이끌고 갔습니다. 그는 카이사르가 계획했던 파르티아 원정을 완수했고, 카이사르의 내연녀였던 클레오파트라가 바라는대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으며, 로마 제국을 이집트 왕조에 합병시켜 로마 제국에 이집트를 끌어들였습니다. 안토니우스에게 붙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카이사르의 자식이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카이사르의 서자이며 군대의 나머지 절반을 손에 넣은 아우구스투스는 스스로 최고의 정치가가 되었습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맞서, 아우구스투스는 이탈리아에서 민족적이고 공화주의적인 감정을 고조시켰습니다. 그러나 기우너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물리친 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물러낸 악마와 대면해야 했습니다. 그는 공화주의와 군주정을 독특하게 절충시킨 원수정이라는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이 제도는 변덕스럽게 카이사르의 모델로 되돌아가고 점점 더 완전한 전제정으로 퇴행하면서 대규모 군사 반란이 일어난 3세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로마의 통치 체제는 그리스 로마 문명과 더불어 급속히 쇠퇴했지요. 250년 동안 6백만명이 평화롭고 체계적인 통치 체계가 가져다준 물질적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숲을 벌목하고, 사막을 경작지로 바꾸고, 무수히 많은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로부터 당시에 알고 있던 세상 끝까지 스며들었던 정의와 기품이라는 불후의 기념비를 창조햇습니다. 그 후 로마인은 수십만 명의 원주민과 야만인 병사의 먹잇감으로 속절없이 전락했지요. 로마 제국의 몰락은 역사상 가장 비참한 사건입니다.
원수정 체제에서 군주나 황제는 선하든 악하든 모든 행위의 우너천으로 여겨졌습니다. 모든 사람의 삶과 안녕은 명백히 이 한 개인의 의지와 성격에 달려있었지요. 그러므로 이 시대에 전기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기록자'이자 자신이 되돌아본 그리서, 로마 세계의 매혹적인 '밀고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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