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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은 기원전 6세기는 반동의 시대였습니다. 그리스인은 앞선 세대의 격렬한 반발에 뒤축되었지요. 이 세기는 '7현자'의 시대, '중용'이 격언이었던 시대, 스스로를 법이라고 주장하던 귀족에게 재갈을 물리던 시대였지요. 이 억압의 시대 동안 스파르타에서 발달했던 풍요롭고 다체로운 문화는 단 하나의 긴급한 관심사, 다시 말해 전쟁과전쟁 준비로 위축되고 말았습니다. 스파르타 귀족정의 문화 수준이 낮아지면서 귀족이 전수해왔던 예술과 문학도 쇠퇴했습니다. 스파르타인은 무장한 군대가 되어 용맹스러운 동지애를 가지고 매우 엄격한 내핍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농노(스파르타인의 15배에 달하는 농노가 있었습니다.)가 반란을 일으켜 자신들을 해치지는 않을까 염려했고, 당시 그리스의 정세(그리스인 3백만 명 중 스파르타인은 1만 5천명)에서 자신들이 확립한 지도력이 위태로워지지 않을까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아테네의 발전 과정은 스파르타와 정반대였습니다. 귀족이 정체적 권리의 독점권을 빼앗겼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스파르타와는 달리 아테네에서는 농노에게 시민권을 허용했습니다. 아테네 민주정이 성장하는 동안 아테네인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귀족이고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아테네 사회의 문화 덕분에 민중의 삶이 고귀해질 것임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팔레스트라와 김나지움을 세우고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수고와 비용을 귀족이라 해서 면제받지는 못했습니다. 여기에서는 빈자와 부자가 동등하게 신체를 유연하고 우아하게 단련할 수 있었고 이러한 활동을 통해 매력과 활력을 함께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귀족은 대체로 민중이 참여해야 했던 시 경연대회를 열고, 모든 계층이 문학과 예술(무엇보다 서정시에 사용되는 말과 희곡의 합창단에서 사용되는 음악)을 배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아테네에서 귀족정은 점차 사라져갔지만, 아테네인들은 그리스 전체의 귀족이 되었지요.
아테네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아테네의 가장 탁월한 정치가 테미스토클레스의 공이 컸습니다. 이 사람의 생애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도 실려있습니다. 선견지명을 가진 테미스토클레스의 지도력으로, 아테네인들은 엄청난 재정적 비용을 치르면서 무적함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의 헌신과 전례가 없는 영웅적 행위로 스파르타와 힘을 합해 페르시아 제국을 물리치고 해양 제국을 세웠습니다. 아리스티데스는 처음에는 테미스토클레스와의 경쟁에서 밀려났다가 나중에는 그의 충실한 협력자가 되었지요. 그리고 페리클레스는 자연학, 철학, 법학, 예술, 문학에 관심을 기울였고여기서 나온 결과물을 잘 활용한 덕분에 그리스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민주주의 제도를 완성했을 뿐 아니라 아테네 제국의 임무를 분명하게 조직했습니다. 모든 시민에게 공적 사업에 대한 동등한 자격이 주어져야 한다는 원리를,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페리클레스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보다 더 열렬한 제국주의자로 살았던 사람도 없습니다. 담고 있는 의미를 모두 고려하더라도, 아테네 민주주의는 사실항 아테네 해양 제국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아테네에 종속된 동맹국들이 아테네인에게는 반드시 필요했지요. 마치 플라톤의 이상인 철인 국가에서 시민에게 노예, 기술자, 상인이 꼭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스파르타는 이 아테네 제국을 파괴하려 했고, 이 목적을 위해 아테네를 상대로 10년 동안 성과 없는 전쟁을 치렀습니다. 아테네 출신의 간악한 천재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의 민주파에게 시칠리아로 원정대를 보내야 한다고 무리하게 요구함으로써 결국 스파르타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뤄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테네를 패배시킨 것이었습니다. 아테네 원정대가 시라쿠사에서 무시무시한 재앙을 겪은 후 아테네의 속국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더이상 공물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아테네에 맞서 힘을 합친 시칠리아와 스파르타, 페르시아에 저항할 수 없게 되면서 아테네는 기원전 405년에 패배했습니다. 성인 남자 5만 명으로 이루어진 어떤 도시가 아테네만큼 평화와 전쟁의 과업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스가 세계를 이끌었을때 그리스를 이끈것은 아테네였습니다.
스파르타인은 평화를 얻었지만 그 평화는 공모국인 페르시아와 시라쿠사의 지지가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와 사이가 틀어지자, 스파르타는 단번에 평화를 잃었습니다. 기원전 387년 안탈키다스의 평화조약으로 평화를 되찾았지만 16년 후 레욱트라 전투에서 테베에 패배했지요. 테베는 위대한 전사이자 정치가인 에파미돈나스에게 전적으로 의존했습니다. 기원전 362년 전투에서 그가 사망하자 테베 패권도 곧 몰락했습니다. 기원전 356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태어났을 무렵에는 그리스인이 2백 년 동안 추구해왔던 목표가 비로소 달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럽의 모든 그리스 도시는 크든 작든 기원전 7세기에 그랬듯이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의 데모스테네스 전기가 보여주듯이, 그리스인은 끊임없이 서로를 두려워하고 시기하여 파벌투쟁을 벌였고 분열하지 않고 연합해야만 피할 수 있는 커다란 위험의 그림자를 껴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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