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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학들의 필독서 목록을 들여다보건 반드시 접할 수있는 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제가 소개드리고자 하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입니다. 사실 돈키호테는 아동용이 아닌이상은 축약본을 읽어도 좋으니 반드시 일독해야할 책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 돈키호테 완역본을 읽으려는 분이 계시다면, 그 엄청난 양에 짓눌리기 전 제가 팁을 하나 드리고싶습니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에서 염소지기나 양치기에대해서 말하는 부분은 곧이어 쓸데없는 소리가 나온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세르반테스가 당시에는 돈키호테로 청중들을 즐겁게 했지만 현대에 빠르디 빠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전원적이야기들은 와닿지  않기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앞서 말한부분과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시들은 모두 건너뛰고 읽으셔도 좋습니다. 혹자들은 세르반테스가 세계에서 알아주는 신통치못한 시인이라고들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당부의 말씀은 꼭 현대에 나온 번역본을 읽으시란 겁니다. 그리고 각 챕터별 당부말씀 드리자면, 소설 1부에 가끔 나오는 따분한 문장이나 챕터때문에 기가 질리지 마십시오. 제2부까지 꾹 참고 계속 읽어나가십시오. 제2부가 더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훌륭한 작가들도 때때로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을 통해 자신을 교육하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레판토 해전에서 부상을 당한 세르반테스에게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에 대해 글을 쓰면서 세르반테스는 두 캐릭터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1부와 2부의 발간 시기에는 10년의 터울이 있는데 이 기간동안 세르반테스의 천재가 더욱 발달했습니다.
이러한 당부의 말이 사전에 필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실낙원이나 신곡처럼 돈키호테는 독자들이 열심히 읽어주기 보다는 숭배의 대상으로 여기고, 즐긴다기보다는 칭송하기에 바쁜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의 인기도 부침이 있었는데, 18세기에 이 소설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지만 현대에와서는 그리 널리 읽히지 않는 실정입니다. 이 책은 성경을 제외하고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번역되고 연구되는 대여섯권의 책들 중 하나인데 말입니다.
그런 이유들 중 하나는 매우 간단한데 세르반테스 자신이 제시한 것입니다. 제2부의 2장에서 세르반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여윈말을 볼때마다 이렇게 말할것이다. '저기 로시난테가 간다.'' 달리 말해서 그의 책에는 즉각 알아볼수있는 인간의 타입들이 존재하는데 이 경우에는 인간보다 타입에 강조점이 놓입니다. 누군가를 가리켜 '돈키호테 같다'거나 '그것은 풍차에 돌진하는 행위이다' 라고 말하면 온 세상사람들이 그 의미를 이해합니다. 이처럼 영원히 살아있는 문학 속의 인물들은 몇 되지 않습니다. 햄릿이 그중 하나이고, 우리의 돈키호테가 바로 또한 그중 하나입니다.
두번째 이유또한 간단합니다. 독자가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천천히 따라가면 그것이 오디세이아에 버금가는 모험스토리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책은 젊은이들을 위한 고전이 되었습니다. 몇년 뒤 이책을 다시 읽으면 이것이 마음의 모험담이란 사실을 깨닫게됩니다. 이 소설속의 가장 흥미로운 사건들은 기사와 수다스러운 시종의 대화속에서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기사인 돈키호테와 시종인 산초 판자는 말을 아주 재미있고 흥미롭게 창조하는 대화꾼들 입니다.
세 번째 이유도 간단해보이지만 실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돈키호테는 아주 유머러스한 소설입니다. 이 책과 관련하여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고 합니다. 스페인 펠리페 3세가 지방 순찰을 나갔다가 길옆에서 책을 읽고있던 어떤 남자가 눈물을 줄줄 흘릴 정도로 크게 웃고있는것을 보았습니다. 이 모습에 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남자는 미쳤거나 아니면 돈키호테를 읽고있을 것이다' 라고 말이지요. 어떤 독자들은 큰소리로 웃고 어떤 독자들은 빙그레웃고 어떤 독자들은 겉으로 웃고 또 어떤 독자들은 속으로 웃고 또 어떤 독자는 기쁨과 슬픔에 뒤섞인 기이한 감정으로 웃으며 보는 작품이 바로 이 돈키호테 입니다.
세르반테스의 유머는 정의를 내리기가 힘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유머가 세르반테스 내면에 깃들어있는 개인적 특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전체가 하나의 유머이고 그래서 신비로운 것입니다. 이 유머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단서는 돈키호테의 영역자 월터 스타키의 논평입니다. 스타키는 세르반테스를 유머리스트라고 부르는데 세르반테스가 한 번에 한가지 이상의 것을 볼수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평론했습니다.
이 논평은 돈키호테의 위대함을 잘 설명해줍니다. 돈키호테의 의미는 애매모호하지 않은데도 세대에 따라서 그리고 독자에 따라서 달라지고 그처럼 다르게 수용되는 의미는 결코 사소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르반테스가 기사도 로맨스에 대한 풍자로 이 소설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그 자신도 그런 뜻의 말을 한 적이 있고요. 슬픈 표정에 비쩍 마른 반백의 기사 돈키호테는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의 시종인 땅딸막하고 격언을 많이 늘어놓는 현실적 인물 산초 판자 또한 그러합니다. 그러나 소설 끝 부분에 이르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고 비평가 살바도르데 마다리아가가 지적한것처럼 서로 닮은꼴이 되어있습니다. 이 두 인물은 우리 인간믜 서로 갈등하는 요소를 상징한다고 할수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에 도전을 하는가 하면 사회를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영웅적인 것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의심스럽게 여깁니다.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세상을 창조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아쉽게도 현재의 상태를 씁쓸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돈키호테의 문제를 햄릿의 문제 못지않게 흥미롭게 여깁니다. 이 책은 기사도에 대한 조롱인가? 아니면 어떤 구체적 시대나 제도와는 상관없이 기사도적 태도를 옹호하려는 시도인가? 꿈꾸는 자들에 대한 풍자인가? 꿈꾸는 행위에 대한 옹호인가? 만약 그렇다면 왜 모든 국가와 민족의 사람들에게 그토록 분명하게 호소하는가? 이 소설은 저자의 정신적 자서전인가? 정신 이상에대한 연구서인가? 아니면 보통사람보다 더 수준 높은 정상적 정신상태에 대한 연구인가? 마지막으로, 돈키호테는 마크 밴 도렌이 지적한 것처럼 일종의 배우인가? 그런 다양한 배우의 역할을 연기함으로써 어떤 단일한 불변의 성격을 가진 사람과는 다르게 인생의 다양성을 널리 수용하여 깊이 명상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처럼 돈키호테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게 나올수있는 것입니다.
이에대한 판단은 돈키호테를 읽는 우리들의 몫으로, 이 책을 읽음으로써만 얻을수있는 것입니다.  영국 역사가 머콜리는 돈키호테를 가리켜 "비교의 대상이 없는 세계 최고의 장편소설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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